나의 이야기/유럽에서 살다

<31일차> 오랜만에 관광객처럼

아상블라주 2015. 7. 16. 23:55

새벽부터 내리쬐는 햇살에 깊게 잠을 자지 못했다.

상태도 좋지 않아 늑장을 부렸다.

어느새 방에는 나와 한 청년만 남았다.

그러고보니 카우치 서핑을 통하거나 누군가에게 물어봐야할 때가 아니면 말을 걸어본 적이 없구나.

약간의 용기를 내어 인사를 건냈더니 그 다음부터는 말이 술술 나왔다.



Fernando는 멕시코 출신인데 폴란드에 교환학생으로 왔다고 했다.

학기가 끝나 3주간 여행 중이다.

학생 신분이라 돈이 부족해 무료인 것만 관람하는 중이라고 했다.

교환 기간인 5개월 동안 유럽 곳곳을 여행한 그가 대단해보였다.

그는 자전거로 여행 중이고,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니 각자 길을 떠났다.

오전 9:55  Map


따가운 햇살이 단잠을 깨울 때는 그리 밉더니, 밖으로 나오니 이리 좋을 수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한 아기가 유모차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며 손짓을 해서 다가갔더니 활짝 웃었다.

덴마크인은 모르는 사람에게 경계심이 있기에 어쩔까 하다가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기가 나를 좋아해서였을까 부모님이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버스도 오지 않고 배도 고프고 해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출발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얼른 마켓으로 가자.

오전 10:12  Map


호스텔이니 조리가 될 테고, 세 끼니 먹어야 하니 피자 세 판에 우유, 물, 바나나를 구입했다.

그런데 웬걸.

호스텔에서 조리 기구를 빌리려면 돈을 내야 한단다.

기구가 담긴 큰 플라스틱 상자의 대여비가 100크로네라고 했다.

내가 요리를 할 것도 아니고 괜찮다고 하니 1크로네에 플라스틱 포크 하나만 따로 줄 수 있다고 했다.

쳇. 도구 값을 따로 받다니.

다행히 부엌에 있던,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접시와 나이프 덕에 피자를 데워 먹을 수는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피자도 맛이 없다.

역시 싼 게 비지떡이다.

오전 11:27  Map


식사로 인해 우울해진 마음을 달래며 Nyhavn 근처로 갔다.

비싼 Copenhagen 카드를 활용하기 위한 첫 코스로 Canal을 타고 운하를 따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오후 2:03  Map



유쾌하고 열정적인 안내를 들으며 한 시간 동안 관람을 했다.

최근 경험하지 못한 좋은 날씨에 바다를 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베를린 이후로 처음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꺼냈다.

뛰어가지 않고도 멀리 있는 것을 마음껏 확대해서 촬영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운하 주변으로 일광욕 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카약과 요트가 우리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에게 인사하며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들도 보였다.

관광객이 관광객을 쳐다본다.

배에 타 있는 사람은 한가롭게 물가에 앉아서 쉬는 사람이 신기하고, 반대로 앉은 사람은 배로 물살을 가르며 지나가는 사람이 신기하다.

배가 파도를 가르다보니 가끔 바닷물이 얼굴을 적셨다.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이 멀리까지 퍼졌다.



Copenhagen의 명물, 인어공주 상 앞에는 많은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뒷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만족스런 항해 후에는 바로 앞에 보이는 Christiansborg 성으로 갔다.

덴마크의 옛 궁전이다.

입구에 전망대가 있길래 올랐더니 한 눈에 Copenhagen이 보였다.

제일 높은 건물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시청보다 40cm 높게 증축했단다.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난 Copenhagen 카드 소지자니까 당당하게.

화장실은 무료인데다 시설도 좋다.

심지어 모든 곳에서 Wifi도 잡힌다.

멀리 동양에서 왔다고 대접이 후한 건가, 인심이 좋네.

궁전 내부는 덧신을 신어야 들어갈 수 있다.

마치 다른 학교로 출장 온 기분이다.

오후 2:46  Map


그러고보니 서양의 궁전 내부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다.

생각한 것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격식 있고 기품이 넘쳤다.

각 방마다 장식이나 예술품에 맞는 이름이 있다.



여왕님의 도서관.

이렇게 책을 진열하면 더 읽고 싶어지려나?




왕가가 쓰던 그릇이다.

우리 나라의 그것과는 다른 느낌의 기품을 뽐낸다.



샹들리에 아래에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장소.




가장 인상이 깊었던 방이다.

만찬회 등의 행사를 하던 곳인데 벽은 직조 미술품으로 가득하고 천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예전에는 왕과 왕비가 근엄하게 앉아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겠지.



긴 내부 관람을 마치고 지하에 있는 폐허로 갔다.

Christiansborg 성은 수백년에 걸쳐 여러 차례 재건하고 고쳐졌다.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인데 지하 가득 옛 성터나 유적이 전시되어 있다.



이왕 온 김에 궁전을 다 구경하겠다고 마음 먹고 종료 10분 전에 들어간 왕궁 마굿간.

이전에 왕족들이 썼던 마차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바퀴가 사람 키만 했다.

차분히 둘러보지 못했지만 각 시대별로 마차의 생김새가 다른 것이 눈에 띄었다.



지난 왕들이 타고 다닌 말을 형상화해놓은 공간인데 왜 한 사람만 저리 전시해놓은지 모르겠다.

저 왕이 예술을 좋아해서였을까 누군가에게 밉보인 걸까.



나오면서 궁전 전경을 촬영했다.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다음으로는 가장 가고 싶었던 히피의 마을, Christiania로 갔다.

군사지역이었던 곳에서 군대가 철수하자 히피들이 자신들만의 공간으로 만든 마을이다.

긴 기간 동안 덴마크 정부와 마찰이 있었지만, 현재는 관광지로 정착된 상태다.

여전히 마을에는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이 모여 자치 운영하고 있다.

지역의 큰 일은 직접 민주주의로 해결하는, 마리화나가 버젓이 판매되고 그래피티가 가득한 이상하고도 평화로운 마을.

그 독특한 이야기를 Nicolai에게 들었을 때부터 가보고 싶었다.


입구부터 상가까지 관광객들이 즐비했다.

술을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는 사람들부터 그들을 구경하는 이까지 다양했다.

이곳은 마리화나 판매로 인해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물가의 잔디밭에는 사람들이 누워 이야기를 나누거나 편안히 쉬고 있었다.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독특한 마을이었다.

이런 실험이 가능한 것은 다름을 인정하고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덴마크인의 신념 때문은 아닐까.


피곤하고 배가 고파 일찍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숙소에서 누군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피자를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다른 먹거리를 사기 위해 마켓에 들렸다.

기구를 빌리지 않고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숙소 근처의 마켓으로 갔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를 악 물고 1km 떨어진 다른 곳에 찾아갔다.

그나마 먹을 만한 건 샌드위치 뿐이다.

두 쪽에 50크로네.

샌드위치 하나 사겠다고 이리 헤맸구나.

아예 식당에서 먹을 걸 했다.

오후 6:25  Map


여행기를 마무리할 때까지도 한 명도 들어오지 않았다.

얼른 씻고 잠이나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