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유럽에서 살다

<33일차> 안녕, 덴마크. 안녕! 스웨덴

아상블라주 2015. 7. 18. 22:01

아무리 자도 방이 어두컴컴해서 이상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아홉시였다.

매일 밝은 햇살에 눈이 부셔 일어나다보니 어둠이 새벽을 뜻하는 줄만 알았다.

체크아웃까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어제 추천받은 곳들도 가고 싶어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얼른 숙소를 나섰다.

실은 호스텔 샤워실 시설이 좋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오전 9:42  Map


어제 지나친 Rosenborg 성을 다시 찾았다. 

개장 전에 도착했더니 사람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네.



다른 성과 크게 다르지 않아 금방 둘러볼 수 있었다.


약간 실망한 채 성내의 보물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입구부터 입이 벌어졌다.

영화나 게임에서만 보던 것들이 즐비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구형 무기들이었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한 것들만 모았는지 장식까지 훌륭했다.




다른 한 쪽에는 와인을 보관하기 위한 도구들이 가득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왕관과 보검 등을 볼 수 있었다.

덴마크가 이 정도라면 다른 곳도 만만치 않겠구나 싶었다.



현 왕족이 사는 성보다 오히려 경비가 삼엄했다.

아니, 복장이 더욱 군인다웠다.

관광객이 옆에 다가와 사진을 찍어도 한눈 팔지 말아야 하는 상황을 보며 옛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 눈은 이 매서운 눈매의 군인이 한 여자를 힐끔 쳐다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Rundetaarn에 올라가다 건축설계전시회가 있길래 한 바퀴 둘러봤다.

건축가는 생각을 곧장 현실로 옮기지 않는다.

세밀한 모델을 지어보며 자신이 빠뜨린 것은 없는지 확인한다.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 때 '시크릿' 열풍이 불었다.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그것을 이루어준다고.

최근 대통령의 발언으로 더욱 유명해진 문구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하지만 맹목적으로 믿지 않는다.

무언가를 바라면서 행동이 뒷받쳐주지 않는다면 망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저 제자리에 앉은 채로 생각만 한다고 변하는 것은 없다.

작은 것이라도 시작해야 꿈은 현실이 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변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전 11:22  Map



Rundetaarn 정상에서 마지막으로 Copenhagen을 둘러봤다.

도시 전체가 익숙하다.

푸른 하늘과 여유로운 모습들.

언젠가 다시 찾을 수 있겠지.


덴마크를 떠나기 전에 한 번 거하게 식사를 하고 싶어 뷔페로 들어갔다.

거하게 라는 표현을 썼지만 저렴한 뷔페다.

하지만 가격 대비 음식이 푸짐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이곳에서 영국에서 어학연수 중인 한국 청년들을 만났다.

주말에 잠시 여행온 거라고 하길래 여러 관광지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고 지도를 넘겼다.

나의 경험과 사소한 나눔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에 기분이 좋다.


식사를 마칠 즈음 한국인 관광객이 단체로 들어왔다.

유럽에서도 이렇게 다니는구나.

참 다양한 방식의 여행이 있다.

오후 1:09  Map



지금까지 세 번이나 도시관광카드를 구입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활용한 카드다.

72시간 동안 나를 도와준 녀석이 고맙다.

마지막까지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줬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통비를 줄이기 위해 공항으로 왔다.

코펜하겐카드가 있으면 공항까지 무료니까!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가득했다.

나도 한 달 후면 비행기를 타겠구나.



덴마크와 스웨덴은 바다로 나뉘어 있지만 10여년 전에 다리가 연결되었다.

특이하게도 다리의 반은 바다 속을, 반은 바다 위를 지난다.

다리의 덴마크 쪽은 공항이 가깝고 스웨덴 쪽은 배가 많이 다녀서라고 한다.

어디가 국경인지도 모른채 스웨덴으로 넘어갔다.

많은 추억을 남겨준 덴마크여, 안녕.



국경을 넘을 때마다 매번 심카드 사는 것이 어렵구나.

그래도 주인장이 끝까지 도와줘서 충전까지 완료!

남은 덴마크 동전을 팁으로 드렸다.

웃음과 재치가 가득한 분인데 사진을 찍을 때는 저절로 표정이 굳어졌다.

그 후에도 고생 끝에 현금인출까지 완료!

오후 4:53  Map


버스를 타고 목적지 정류장 이름을 말했는데 기사가 알아듣지 못했다.

다행히 우선 타고 내릴 때 말해달라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고 얼마냐고 물었더니 그냥 내리라고 했다.

우와. 인심 한 번 후하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이곳은 현금으로 계산하지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어떤 정류장 근처에는 티켓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오후 5:02  Map



숙소로 가는 동안 아무 것도 없이 드넓은 평원을 만날 수 있었다.

사람도, 새들도 드문드문 자신 만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풍경을 즐기며 한참을 걸어가니 작은 요트와 배로 가득한 정박지가 보였다.

문을 열지 못해 낑낑 대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새 호스트 Nisse다.

그는 음악가인데 여름이면 몇 달간 작은 범선에서만 생활을 한다.

스스로 노마드를 자처하는 그의 삶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반갑게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그가 늑대 울음소리를 냈다.

멀리서 한 여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Nisse의 친구, 베로니카였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는 정말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다.

미술관에서 전시를 기획하는 일을 한다.

그녀는 벌써 1년째, 심지어 겨울에도 배에서만 지낸다고 한다.




이들을 이렇게 살게 한 선박에서의 삶이 가진 매력은 무엇일까?

정박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6시가 넘어 새로운 카우치 서퍼가 그의 배를 찾았다.

독일인 남매인데 오빠는 22세의 음악가, 여동생은 13살(!)의 학생이다.

그들이 짐을 풀자마자 저녁 준비를 했다.

네 명이 함께 요리를 하니 뚝딱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 수 있었다.



오빠가 Nisse와 시내 관광 계획을 짜는 동안 나는 여동생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에게 여행 사진을 보여달라고 하자 자신이 찍은 동영상이라며 수줍게 보여 줬다.

그녀는 어린 나이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음악과 영상, 언어 등 벌써부터 관심 분야에 두각을 보였다.

이미 4개국어가 가능한 그녀가 대단하게 보였다.


남매가 시내로 간 동안 Nisse와 함께 주변을 산책했다.

그동안 줄리아와 마이누스를 만났다.

줄리아는 요가 강사이고 역시 배에서 지낸다.

주근깨가 매력적인 그녀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따스히 안아준다.

마이누스는 범선계(?)에서 제법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따로 거처가 없이 수십년 째 작은 배로 항해하며 온갖 경험을 한 남자다.

바다 한 가운데서 조난을 당하고 총에 맞기도 하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는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Nisse는 그를 작년에 만났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이 사람이 인터넷 상의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급속도로 친해졌다고 한다.

그는 당장 다음 주에 스코틀랜드를 넘어 스페인으로 갈 거라고 했다.

부디 안전히 도착하기를.



밤이 되니 바람이 거칠어지고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오랜만에 외투를 삼겹으로 입었다.

그래도 여전히 추웠다.

그에 비해 야경은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오후 10:04  Map


밤 늦게 남매가 도착했다.

안타깝지만 강한 바람 탓에 야간 항해는 포기하기로 했다.

남매가 다음 날 일찍 출발해야했기 때문에 아쉽지만 금방 대화를 마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