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건너 뛴 여행기 때문에 몇 가지 주석을 적어둡니다.
-7월 2일 이후로 덴마크를 돌아다녔습니다.
Kolding - Silkeborg - Bryrup - Aaruhus - Odense를 지나 현재는 Copenhagen 북쪽의 작은 마을 Birkerod 입니다.
- 현재는 Jens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81세 노인이지만 여전히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온갖 종류의 서적과 자료를 독파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제학생들을 자신의 집에서 묵게 하며 그들을 돕고 있습니다.
Zeeshan은 파키스탄인이지만 현재 이 마을에서 우체부를 하고 있고, 덴마크에 계속 살 예정입니다.
Deo는 베냉의 유학생이고 농업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2주 후에 프랑스로 가서 공부를 더 할 예정입니다.
Farit은 알제리의 유학생이고 건축 박사과정 중에 있습니다. 다음 달에 일본에 건너가 일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니 천장까지 가득한 책이 나를 반겼다.
거실로 나가니 Zeeshan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이른 시간부터 표정과 말투에 기운이 넘쳤다.
보기만 해도 즐거운 친구다.
Jens가 식사했냐고 묻자 재빨리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가 함께 먹자며 내어준 것은 우유와 씨리얼.
젊은 청년이라면 신경쓰이지 않을 일인데 나에게도 편견이 제법 있나 보다.
먹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그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Jens가 준 코펜하겐 책자를 보고 있는데 Farid가 거실로 나왔다.
차와 과자를 내어주며 시내의 갈 만한 곳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저녁에 비빔밥 같이 먹자는 내 제안에 그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워낙에 관심사가 많아서 공부하고 여러 활동을 하다보면 평소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자정이라며.
Jens에게 집에 책이 얼마나 있냐고 물어봤다.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사서는 책을 숫자가 아닌 책장 길이로 셈한다고 했다.
보유하고 있는 책장이 240 shelf meter.
어림잡아 최소 만이천 권의 책이다.
그것도 600페이지 이상의 두꺼운 책이 반 절 이상.
짐작은 했지만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지적 허영을 위한 전시가 아니다.
하나하나 그의 손길이 닿아 있다.
오후 1:05 Map
Jens가 Zeeshan의 전화라며 나에게 전화기를 건냈다.
일이 빨리 끝났다며 함께 저녁거리를 사러 가자는 내용이었다.
그러자고 흔쾌히 대답했는데 30분 후에 다시 연락을 받았다.
왜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냐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Zeeshan 15분 후에 마켓 앞에서 보자는 것을 내가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부엌에서 요거트를 만들고 있던 Deo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크게 신경쓸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다들 영어 발음이 달라 자신도 처음에 여러 번 실수했다며.
그래도 걱정하는 나를 본 Deo가 Zeeshan은 금방 기분이 풀리니 괜찮다며 웃었다.
얼마 후 Zeeshan이 도착하자마자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그는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왜 못 알아듣냐고 투덜거리면서도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배고프다며 점심을 챙겨 먹는 그에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나도 먹으라며 사슴 고기를 넣은 샌드위치를 건냈다.
Zeeshan이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행복은 순간이다.
어제 맛있는 음식을 먹어 행복했다고 해서 오늘 또 먹는다고 그만큼 행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족은 길다.
순간의 즐거움이 아니라 이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
덴마크인들은 무뚝뚝하지만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오후 2:53 Map
식사를 마친 Zeeshan과 장을 보러 갔다.
그는 마켓의 입구에 있는 꽃을 보더니 이리저리 살피다 빨간 꽃을 들어올렸다.
그를 보면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난다.
화났을 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Jens를 위해서 꽃을 사다줄 수 있는 남자.
오후 3:57 Map
비빔밥을 만드는데 내가 볶는 역할을 맡은 건 여행 중 처음이다.
내가 고기와 채소를 볶는 동안 옆에서 Zeeshan이 호쾌하게 텅텅 소리를 내며 썰더니 금방 마쳐버린다.
우와, 빠르네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두께가 두껍고 엉망이었다.
그가 쉬러 간 동안 나는 음식을 볶으면서 너무 두꺼운 것을 잘게 썰었다.
초밥용 쌀이 아니라 밥짓기는 Zeeshan이 하기로 했다.
끓는 물에 소금을 듬뿍 넣는다.
간을 최소화하는 나보고 그걸 어떻게 먹냐고 타박한다.
하하하하하핫.
이렇게 다른 두 명이 함께 요리를 하다니.
짜증이 나기 보다는 즐거웠다.
결국 비빔밥이 비빔밥이 아닌 음식이 됐지만 말이다.
식사를 하는 동안 내가 Zeeshan을 보면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Jens가 갑자기 음악을 틀었다.
LP판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삽입곡이다.
그러더니 자기가 본 한국영화 중 인상깊은 것이 있다며 줄거리를 말해줬다.
내용을 들어보니 이창동 감독의 '시'다.
제목을 들은 그가 잊어버린 제목을 알려줘서 고맙다며 기뻐했다.
음식은 Zeeshan과 내가 했으니 정리는 Deo가 했다.
설거지를 하는 그의 옆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가족을 무척 아낀다.
자신은 가족을 위해 일을 하려는 거지 일을 위해 살고 싶진 않다며 웃었다.
여행 후 네 번째 영화다.
영어 자막은 두 번째.
'Picnic at Hanging Rock'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소녀 실종을 다룬 미스테리 영화다.
극 중 제기된 의문 중 어느 하나 해결되지 않고 끝나는 무지막지하게 열린 결말이다.
뛰어난 영상미와 시대적 갈등 요소를 은유하는 수작이다.
확실히 영상은 언어를 공부하는 방법으로 탁월하다.
대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더라도 그들의 몸짓과 표정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후 7:48 Map
늦은 밤까지 Jens와 이야기를 나눴다.
중간에 Deo와 Zeeshan이 와서 함께 수다떠느라 끊기기도 했지만 그는 맥락을 놓치지 않고 늦은 밤까지 나에게 생태학에 대해, 세계의 위기에 대해, 그의 노력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생활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그의 전문적인 말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나에게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고령의 그가 여전히 세상을 염려하며 끊임 없이 공부를 하고 다른 전문가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며 소통하는 것만으로도 듣는 내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지금부터 공부하기에는 늦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생태학을 알게 된 것이 32살이었다며 충분히 젊지 않냐며 웃었다.
무얼 하든 간에 목표를 먼저 생각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도 괜찮아.
Jens와 Zeeshan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한 쪽이 평생을 진지하게 살았다면, 다른 쪽은 인생을 즐기며 살았다.
그런 둘이 만나 이제는 짖궂은 농담까지 던지며 서로를 아낀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이렇게 완성되었을까.
나도 진지함과 유쾌함이 균형잡힌 삶을 살고 싶다.
마음을 다잡고 새벽까지 공부하는데 자정이 되어서야 Ferit이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공부하고 활동하다 왔으면서 내일 과제가 있다며 준비를 한다.
그는 웬만한 한국인보다 바쁘게 사는 것 같다.
다만 누군가에게 떠밀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서 그렇게 한다.
그가 덴마크의 유명 디자이너 'Jacobsen'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이 반짝거린다.
다양한 색깔로 살아가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 자극을 받는다.
나는 어떤 색깔의 삶을 살고 있을까.
어떻게 만들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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