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유럽에서 살다

<17일차> 마른 하늘에 날벼락

아상블라주 2015. 7. 2. 21:39

눈을 뜨니 집이 조용했다.

Johanne는 출근했고 Anne는 퇴근할 무렵이었다.

천천히 씻고 짐을 챙기는데 Anne가 집에 도착했다.

밤새 일해서 얼굴 가득 피곤함이 배었다.

오전 내내 별다른 일정이 없다.

숲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글을 썼다.


여름색의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햇빛이 방 안까지 들어와 웃는다.

여유 있게 식사를 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속까지 편안해졌다.

비록 글은 한 편도 완성하지 못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Johanne가 일찍 퇴근을 했다.

한 시쯤 도착할 거라 했는데 열두 시에 얼굴을 보였다.

오늘은 일이 많아 식사를 하고 다시 출근할 거라고 했다.

잠시 시간이 나는 동안 개와 산책을 할 생각인데 같이 갈거냐고 내게 물었다.

글을 마무리하고 싶은 욕심에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이내 후회했다.

혼자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든 해낼 수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한계가 있는데.


버스 출발 시간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았지만 중간에 심카드를 사야해서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아쉽지만 Anne는 잠을 자고 있으니 어쩔 수 없고 Johanne와 작별인사를 나눴다.

하루 밖에 함께하지 못해서 아쉽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날이 더웠지만 습도가 낮아 즐길만 했다.

왜 유럽인들이 햇빛만 나면 일광욕을 하는지 이해가 된다.

어제 걸었던 숲길을 지나 세븐일레븐에 도착했다.

인터넷에서 확인한 심카드가 있었지만 사용법이 헷갈렸다.

직원에게 도와줄 수 있냐고 요청했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생각보다 과정이 복잡했다.

마이크로 USIM이라 나노 크기로 잘라내야 했고 장착했는데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직원이 해당 회사로 전화까지 해서야 해결이 되었다.

웃으며 도와준 남직원과 기다리는 동안 딸기를 먹으라고 권해준 여직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길을 나섰다.

오후 2:22  Map


심카드를 사는데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촉박해져 점점 발걸음이 빨라졌다.

덴마크 현금이 하나도 없어 출금도 해야 하는데.

버스터미널 옆 현금인출기에 도착했을 때가 출발 10분 전이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인출 금액과 핀코드를 눌렀다.

맙소사.

세 번이나 입력을 실패했더니 카드가 잠겼다.

핀코드 입력할 때 비밀번호+00을 눌러야 하는데 반대로 해버렸다.오후 3:24  Map



남은 시간은 3분.

혹시나 해서 버스로 갔다.

카드로 곧장 표를 살 수 있는 버스였다.

이런.

혹시나 잠긴 카드로 시도해봤더니 역시나였다.

마스터 카드도 되냐고 물었더니 안된단다.

현금도 없고, 비자 카드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버스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터미널은 마스터 카드를 사용할 수 있었다.

카드로 결제하면 그만큼 현금을 주는 방식이었다.

시간도 넉넉해서 현금인출기로 가서 출금했다.

덴마크에서는 비자 카드가 좋은데.

다시 카드를 사용할 수 있을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한국에 돌아가야만 재사용 처리를 해준단다.

포기해야겠다.


인터넷도 할 수 있겠다, 차분히 검색하며 진행했으면 될 일을 크게 만들었다.

어쩌겠나.

이미 지난 일인걸.

여분 카드가 있다는 사실도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도움을 줬지만

이렇게 빨리 혼란을 추스린 내가 자랑스럽다.

토닥토닥.


버스가 나를 격려하는 듯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줬다.

평화로운 자연에 심취해있는 동안 어느새 Kolding에 도착했다.

호스트에게 도착했다고 연락을 하니 금방 데리러 왔다.

산타같은 모습의 중년 남성이 활짝 웃으며 나타났다.

Nicolai는 Social Edaucator 겸 사진작가다.

덴마크에서 흔치 않은 강도로 일을 하는 편이다.

우리에게는 평범한 수준 정도지만.


가장 먼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그의 소박한 텃밭이었다.

토마토, 고추 등을 비롯해서 조금씩 키우는 작물에 물을 주기 위함이었다.

한 가운데에는 식탁과 바베큐 장비도 놓여 있었다.

일년에 200 크로네면 땅을 빌릴 수 있으니 적은 돈으로 행복을 만들 수 있다며 너털웃음을 쳤다.

오후 5:46  Map


저녁거리를 사고 집으로 돌아갔다.

얻어 자는 처지에 이것저것 따질 수는 없지만 안이 많이 지저분했다.

그도 민망했는지 나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집 정리를 잘 하진 않지만 직장 외에도 여러 일을 하고 있으니 게으른 것은 아니라며 빙긋 웃었다.


여름의 토요일마다 Kolding에서 무료 콘서트가 열린다고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얼른 저녁을 먹고 가자고 했다.

빵 위에 고기패티를 올려 먹는 음식이었다.

이틀 만에 먹는 고기라 그런지 정말 맛있었다.



이번 공연은 영국밴드가 주인공이었다.

Kolding은 덴마크에서 6번째로 큰 도시지만 인구가 6만이 채 되지 않는다.

그것 치고는 관람객이 참 많았다.

그만큼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많다는 것이겠지.



넓은 호숫가에 마련된 공연장이라 운치가 있었다.

저녁 7시가 넘었는데도 대낮처럼 환해서 더욱 좋았다.

공연을 구경하는 동안 쓰레기를 줍고 다니는 아이들을 봤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이가 어리니 최저임금보다는 덜 받겠지만 그들에게는 제법 큰 돈일테다.

괜찮은 걸?


공연 중에 Nicolai의 친구 Mustafa를 만났다.

영화 미스터 빈의 주인공을 보는 것 같았다.

유쾌하고 때론 괴상한 농담도 던지는 그가 마음에 든다.



공연 1부가 끝나자 Nicolai가 다른 곳을 둘러보자며 제안했다.

공연장을 지나 호수를 둘러봤다. 

잔잔한 물결의 짙은 푸른색과 하늘의 청명한 푸름이 어울린다.



시내에 들어섰지만 영업을 하는 가게를 찾기가 힘들었다.

우리였다면 네온 간판이 거리 가득히 반짝일 시간일텐데.

운동을 하거나 여유롭게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오래 걸었더니 피곤했던지 Nicolai가 한 술집에서 쉬고 가자고 했다.

우리 말고는 사람이 없었다.

실외에서 햇살을 머금은 잔을 들었다.



Mustafa가 항구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의 차를 타고 도착한 항구에는 많은 배가 정박해 있었다.

Nicolai가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이것은 집 한 채 값, 저것은 40년 전에 나온 배.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를 여름에만 쓴다고 했다.



항구에서 바라본 건넛마을의 풍경이다.

이 정도 크기의 마을에서 지내고 싶다.

그러고보니 석양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우리라면 한 밤인 시간에야 해가 지니.

붉은 빛이 검게 변할 무렵 Nicolai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한국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뭘 보여줘야하나 고민하다가 '올드보이'를 골랐다.


음.

그들에게도 강한 영화인가보다.

웃고 떠들면서 보다가 점점 말이 없어졌다.

Nicolai는 결국 마지막 장면 즈음에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Mustafa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잠자리를 준비했다.

시간도 늦고 피곤했는지 둘 다 금방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