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유럽에서 살다

<12일차> 익숙함을 벗어날 때야 비로소

아상블라주 2015. 6. 27. 04:14

아침부터 영화 한 편을 봤다.

Ole가 좋아하는 박찬욱 감독의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한국 영화를 영어 자막으로 보니 어색하고 신기해서 웃음이 났다.

영화 역시 일반적인 한국 스타일이 아니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의 사랑이라는 소재부터가 독특했다.

오전 11:48  Map



Ole와 함께 하는 마지막 식사다.

그가 먹고 싶다던 만두를 어제 미리 사두었다.

한국에서 흔히 먹는 냉동식품인데 맛있다고 좋아했다.

밀가루와 야채, 고기가 섞여 있으니 건강식품이 아니냐는 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한국 공장에서 생산하는 음식은 믿지 못한다고.

처음으로 꺼낸 건조김치는 매운 맛만 강했지 형편 없었다.

오후에 먼 길을 떠나야 해서 느끼함을 무릅쓰고 두둑히 먹었다.



Ole의 책장에 '죽기 전에 가봐야할 장소 1000곳' 이라는 책이 있길래 한국 부분을 펼쳐보았다.

달랑 두 쪽이다.

그것도 전부 서울.

국가 브랜드다 뭐다 하지만 외국인이 한국에 대해 아는 바는 별로 없다.

꼭 유명해질 필요는 없지만 만약 알려진다면 좋은 이유였으면 한다.


5일간 머문 곳을 떠난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가장 마음 편히 지냈던 곳이다.

이곳에서 Ole와 함께 있는 것이 익숙하다.

하지만 이제는 떠나야할 때.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간다.

서로의 삶이 잠시 마주쳤을 뿐, 다시 각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의미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지만 그로 인해 삶이 변하기에.



친숙해진 함부르크를 떠날 시간이다.

사람처럼 지역 역시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잘 지내다 간다. 안녕!

오후 3:15  Map


승강장에서 Timo와 그의 여자친구 Beyza를 만났다.

둘다 외모와 성격 모두 선남선녀다.

Timo는 시원시원한 성격의 청년이다.

Beyza 터키 2세였는데 영어에 자신 없어 수줍어했다.

함께 지낼 시간이 무척 즐거울 것 같다. 

고맙게도 내 기차표까지 마련해주었다.  

만나자마자 신세를 지는구나.

오후 3:47  Map


기차에 올라탄 후 그동안의 여정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 다른 승객들이 가득 차서 각자 시간을 보냈다.

미리 저장해둔 한국 주간지를 읽었다.

메르스 등으로 인해 여전히 나라가 혼란스러운가보다.

하지만 종이를 벗어난 일상은 지루하고 평화롭겠지.

이곳 사람들도 그리 생각하지 않을까.

신문이나 뉴스를 보지 않는 나로서는 참 평온해보이지만, 속사정은 다르겠지.

생뚱맞지만 급식 기사를 보니 급식이 그립다.

오후 5:04  Map


어느 순간 내 주변의 승객이 모두 하차했다.

잠시 후 한 남성이 나에게 다가와 옆에 자리가 있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그가 당황스럽다는 몸짓을 취하더니 다른 곳으로 갔다.

그 상황을 본 Tomi와 Beyza가 깔깔 웃었다.

그때야 상황 파악이 됐다.

한국에서는 아니오 라고 해야 하지만 영어로는 Yes 라고 해야 했다.

한바탕 너털웃음을 짓고 있는데 젊은 여성들이 와서 빈 자리를 채웠다.

Timo가 잘 됐다며 엄지를 세웠다.


Husum 역에 도착한 후 Timo의 차로 이동했다.

독일에 와서 자동차를 탄 것은 처음인데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시골 길인데 시속 100km 를 훌쩍 넘을 때가 많았다.

그 상황에서도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그들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Timo의 집에 도착하니 그의 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여동생이 타지에 있다며 마음껏 방을 쓰라고 했다.

동생이 중국에 관심이 많아 방에 한자가 가득했다.

뜻풀이를 해주었더니 저 글자를 아는 게 신기하다며 웃었다.



짝과 함께 시골길을 걸었다.

넓게 펼쳐진 들 사이에 시냇물이 졸졸 흘렀다.

개울가에 사람들이 앉아 낚시를 하고 발을 담그기도 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카메라에 담아보려 했지만 마음 같지 않았다.

내일 다시 시도해봐야지.


저녁은 파스타였다.

거창한 방식이 아니라 면을 삶고 데운 양념에 비벼 먹는다.

평범한 독일의 밥상이다.

Max와 Ole는 자취집이었지만 여기는 가정집이다.

이틀 간의 생활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