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유럽에서 살다

<43일차> 감미로운 재즈에 취해

아상블라주 2015. 7. 28. 23:44

부시시한 모습을 한 Patrik이 거실로 나왔다.

너저분한 방에 아무렇게나 걸터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관심사가 같다보니 결국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Patrik의 어조가 강해졌다.

너도 네 나라가 형편없다고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세상은 그대로냐며.

그는 세계 평화가 목적인 국제 기구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를 바라보며 10여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평화를 위한 국제 기구를 만들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었지.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비웃을까 꼭꼭 감췄던 나와는 달리 그는 거침이 없었다.

그의 출근으로 인해 이야기가 도중에 끊겼다.

나중에 좀 더 이어가봐야지.


주말에는 Stavanger로 가서 하이킹으로 유명한 Preikestolen과 Kjeragbolten을 갈 예정이다.

하지만 아는 바가 전혀 없어 어찌해야 하나 했는데 유럽여행 카페에서 나와 일정이 딱 맞는 사람을 발견했다.

연락했더니 친절하게 다 알려주셨다.

덕분에 교통편과 숙박까지 일사천리로 예약을 마쳤다.


늑장을 부리다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 오후가 되었다.

늦은 점심이나 먹어야겠다고 마켓에 들러 먹음직스러운 닭다리를 샀다.

전자레인지로 데우는 사이 여행기를 썼다.

띵. 전자레인지가 다 됐다며 알람을 울렸다.

드디어 맛난 점심을 먹겠구나 했는데 너무 길게 데워 살이 딱딱했다.

아깝고 배도 고파 속이 쓰리다.

쓰레기통에 비우고 내일 먹기 위해 남겨둔 것을 데웠다.


나중에 만난 친구들 말로는 2층까지 냄새가 가득했다고 했다.

멋쩍어서 함께 하하하하 웃었다.


배도 든든하겠다 Mandal을 둘러봤다.

어디를 가야할지 몰라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언덕 위의 전망대 하나.

어떻게 올라가지 하며 주변을 서성이다 가파른 계단을 발견했다.


그래. 며칠 뒤에 있을 하이킹에 대비한다 치고 올라가보자고 생각했다.

예상보다 가파르다며 걱정할 무렵 더 이상 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확 트인 풍경이 나를 반겼다.






오래된 마을 사이로 바닷물이 지나간다.

아니, 굽어 흐르는 바닷가에 마을이 오래 자리하고 있다.

굳이 어디를 구경다녀야 할까.

그냥 이 풍경 속에서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아침에 Patrik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오랜 내 꿈과 공명하여 가슴 밖까지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시원한 바람에 열기가 금방 식었다.



쌀쌀해진다 싶어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마주한 거리에는 어느새 관광객들이 떠난 상태였다.

한적함과 어울리는 마을이다.


옷을 챙겨입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는 사이 한 노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노르웨이인이지만 현재 여행중이라고 했다.

Mandal의 옛 마을을 보고 싶어 찾았다고 했다.



현재 노르웨이에는 Mandal처럼 영화관, 도서관 등을 합친 문화복합공간 건설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는 이런 추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Mandal을 한 바퀴 둘러봤다.

옛 모습을 간직한 집을 만날 때마다 그는 반가워하며 연신 사진기의 셔터를 눌러댔다.

오후 6:02



그러다 한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녀에게 이 마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아주머니는 환한 웃음으로 친절히 대답했다.



그녀가 운영하는 가게에는 온갖 물건으로 가득했다.

아쉽게도 그녀에게 들은 내용은 그의 바람과는 달랐다.

그는 상속을 받지 않는 한 이 마을의 옛 건물을 얻기는 어렵다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예술가들이 들어서서 마을을 지키고 있기도 하다며.

하지만 아주머니의 말로는 최근 들어 집을 팔고 해변가의 새 집으로 이사가는 사람이 많아지는 추세라고 한다.

그의 표정 한 구석에는 착잡함이 자리했다.



그의 차를 주차해둔 해변가까지 함께 걸었다.

노르웨이에서 보기 드문 모래 해수욕장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고 했다.




해변가 주변과 섬에는 사다리가 있는데 연어떼를 찾기 위한 구조물이라고 한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건 처음이라며 당혹스러워 했다.

두 시간 정도 함께한 인연.

이렇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것이 여행의 매력 중 하나이다.





전에 만난 아주머니 말처럼 해안가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한껏 단장한 새 건물 바로 옆에는 살을 붙이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이 지역도 백년 후에는 옛마을이 될까.


자꾸만 눈에 밟혔던 옛 건물 하나.

안에는 오랜 정비 도구들이 가득했다.


다음으로 향할 곳을 바라보는 걸까.


한참 걸었더니 배가 밥 달라며 아우성이다.

Patrik과 약속한 대로 그의 식당으로 갔다.

그가 왔냐며 반겼다.

너와 네 친구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궁금해서 왔다고 하니 웃으며 이곳저곳을 안내해줬다.

한창 바쁠 시간인데 배려가 고맙다.


그가 운영하는 식당은 자체적으로 커피를 로스팅하고 맥주도 담근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지역까지 소문 난 식당이다.

오후 8:26  Map


그와 그의 친구들 모두 집에서 생활하는 것과 딴판이었다.

격식 있으면서도 재치 있게 손님을 대한다.

Mandal에서 낚은 생선으로 한 요리라는데 한국식에 익숙한 나에게는 어색한 음식이다.

여유 있게 소금과 후추의 비율도 다르게 하고, 샐러드도 섞어서 먹어보며 즐겼다.

수제 맥주는 나에게는 딱이었다.

식사를 하며 그들이 일하는 모습과 손님들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반대로 나를 쳐다보는 사람도 많았다.

타국의 관광객이 흔치 않은 곳이니 아시아인은 더욱 신기한가 보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한참을 앉아 있는 내가 자꾸 눈에 밟혔는지 한 친구가 위층에 가봤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니 안내해줬다.

아담하게 꾸며진 방이 텅 비어 있었다.



특이하게 생긴 의자에 앉아 하염 없이 창 밖을 바라봤다.

약간의 취기, 잔잔한 조명, 바다의 물결 그리고 감미로운 재즈.

이런 휴식도 참 좋구나.


여행을 통해 평소 내 생활과는 동떨어진 경험을 많이 한다.

돌아가면 하고 싶은 일이 참 많다.

인생은 즐기기에도 짧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