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유럽에서 살다

<44일차> 두려움을 넘어 가능성을 바라본다면

아상블라주 2015. 7. 29. 23:20

몸 상태가 여간 좋지 않다.

샤워를 하는데 코 안에 핏기가 있자 팽 하고 풀었더니 굳은 피가 나왔다.

입가가 트고 입술 전체가 말라 있다.

여행 내내 건강을 유지했건만 갑자기 왜 이럴까.


멍 하니 있는데 Patrik이 거실로 나왔다.

어젯밤 들어온 것도 몰랐는데 어느새 자고 있었나 보다.

오늘도 일찍 출근하겠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처음으로 꿈꾸기 시작한 뒤 지금까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눈을 반짝이며 듣더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를 물었다.

세상은 넓고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을테니 계속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들은 그가 곧장 'Save the Now'라는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었다.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그것은 추후의 문제다.

오전 11:29  Map


어떻게 사람을 조직하여 국제기구를 만들 것인지 골몰하다가 그가 도대체 '국경 없는 의사회'는 어떻게 조직됐을까 궁금해했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그가 컴퓨터로 뭔가를 써내려가길래 뭐하냐고 했더니 국경 없는 의사회에 낼 지원서를 쓰는 중이라고 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추진력이다.

오후 12:00  Map


그가 일하러 간 사이 여행기를 마무리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수강신청 기간이 다가와 대학원 동기들과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눴다.

듣고 싶은 강의가 한가득이다.

얼른 공부하고 싶다.

오후 1:27  Map



작별인사를 하러 Patrik의 식당으로 갔다.

점잖은 체 하는 그와 마지막으로 사진을 남기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포옹을 나눴다.

같은 꿈을 꾸고 있으니 언젠가 어디에선가 함께할 것이다.


버스를 타고 Kristiansand로 향했다.

해안가로 갈 줄 알았는데 내륙으로 가서 실망하던 찰나, 헉 할 광경이 눈에 펼쳐졌다.

얼른 지도를 보니 여기가 그 유명한 Sogne fyord인가 보다.

버스 기사님, 감사합니다.

아쉽지만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오후 2:07  Map



절경은 놓쳤지만 그래도 몇 장의 사진은 남겼다.

참고로 Sogne fyord는 아니다.


Kristiansand에 도착해 약속장소인 기차역을 찾아 헤맸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몸이 무겁다.

오늘 몸조심해야겠다.

시내를 헤매다 관광정보센터에 들렀다.

기차역을 물어봤더니 친절히 지도에 표시해줬다.

버스터미널 앞이 역이었는데 한 바퀴 돌았구나.

오후 3:22  Map


시내 한 가운데에 있던 교회다.

규모는 크지만 여기저기 오래된 흔적이 보인다.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제법 남았지만 구경하러 돌아다닐 상태가 아니었다.

물통을 베개 삼아 역 안의 벤치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시간이 금세 흘러 몸을 추스리고 밖으로 나갔다.

따스한 햇살 안에 널부러져 있으니 한결 낫구나.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데 차 한 대가 근처로 다가왔다.

안에는 Ann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Ann과의 만남은 특별하다.

그녀는 한국인이지만 만 한 살이 안됐을 때 노르웨이로 입양되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그녀의 이름과 서울에서 왔다는 것이었다.

워낙 어릴 때 떨어져 부모가 그립진 않지만 한국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한다.

그녀는 카우치서핑 경험이 전무하지만, 내가 한국인인 걸 알고 곧장 요청을 수락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녀를 꼭 만나고 싶어 일정을 조정하면서까지 그녀를 찾은 상황이다.


만나자 마자 그녀의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나에 대해, 한국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다급하거나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 아닌, 편안한 미소를 지은 채로.


그녀의 집은 Kristiansand 외곽에 있다.

가는 동안 호수와 숲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9살짜리 남자 아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안고 뽀뽀하고 장난치는 모습을 보니 괜히 흐뭇했다.

아들은 이방인이 궁금한가 보다.

왜 여행하고 있는지, 어떻게 생활하는지, 한국에서는 마인크래프트라는 게임을 하는지 물어봤다.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아들은 삼촌과 함께 아빠의 집으로 향했다.

Ann은 내일 일을 하러 가니 삼촌과 함께 물놀이를 간다고 했다.


너무 피곤해서 잠시 쉬어야겠다고 말하고 방으로 가서 누웠다.

방은 안락했지만 쉽사리 잠에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삼십 여분 누워 있으니 상태가 좀 나아졌다.


둘다 배가 고팠던 터라 시내의 식당으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주방장과 직원이 그녀를 얼싸 안으며 환영했다.

참 기운이 넘치는 사람들이다.


자리에 앉은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누군가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라고 했다.

Tito와 그의 친구 Magnus와 동석했다.


Tito는 스페인 출신인데 장난끼가 가득하고 항상 웃는 낯이다.

Magnus는 스웨덴인이고 의사이며 휴가를 맞아 여자친구를 보기 위해 왔다고 했다.


넷이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눈과 스키를 타면 동심으로 돌아간다는 Magnus,

놀이기구 타는 이야기를 한참이나 풀어놓는 Tito,

꺄르르 웃으며 농담이 끊이지 않는 Ann.

그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리는 얼마나 근사했는지.

해물을 가득 넣은 파스타를 먹고 있으니 와 마그누스가 부러워했다.

미안하지만 Patrik의 식당의 반 값이지만 내 입맛에는 더 맞았다.

게다가 주인장이 멀리서 온 손님이라며 맥주와 손수 만든 사과케잌도 주었다.

배도 마음도 가득해지는 저녁이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그녀와 한참 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무엇이 가장 궁금하냐고 물었더니 평범한 일상이 어떻냐고 물었다.

그 말이 그녀의 허전함처럼 들렸다.

한국의 식사 문화와 가족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한국의 함께 하는 문화가 좋아 보인다고 했다.

여기는 너무 독립적이라 모두가 하나의 섬처럼 살아간다고.

가족과의 거리는 얼마가 좋을까.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구속하지도 않는.

오후 11:30  Map


이야기를 하다보니 내 과거와 두려움에 대해서도 말하게 되었다.

그녀가 가만히 듣더니 자신이 생각하기엔 내가 무척 용감하다고 했다.

아무 계획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나고, 세상을 상대로 꿈을 꾸고.


그녀의 말처럼 나에게는 수많은 장점이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럴 것이다.

두려움과 무지가 그것을 가릴 뿐.

누구나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