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ven이 나갈 채비를 하느라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잠시라도 더 잘 요령으로 침상에서 나오지 않았다.
몇 번 뒤척이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가기 전에 인사라도 해야지.
여행이 만들어준 소중한 인연에게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잠을 깬 김에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남은 먹거리를 정리하러 Nisse가 정박지에 딸린 식당에 간다고 했다.
혼자 갈 수 있으니 나보고는 배에 남아 쉬어도 된다고 했지만 그와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니 같이 가겠다고 답했다.
가는 도중에 베로니카와 린다를 만날 수 있었다.
아침부터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았다.
헤어질 때 따스하게 나를 안아주었다.
귀찮아서 배에 머물러 쉬었다면 그녀들을 만나지 못했겠지
오전 8:18 Map
Nisse는 피곤했는지 잠을 청했다.
밀린 여행기를 조금이라도 써볼까 했지만 어영부영 시간만 보냈다.
Nisse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천장에 달린 문으로 나와 선착장을 거닐었다.
이 풍경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구나.
Nisse와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었다.
소중한 삶에 잠시 자리를 내어준 그가 고맙다.
올 때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다.
한 발짝 걸음마다 미련을 덜어둔다.
이제 새로운 곳으로 가자.
Malmo 바로 옆 Lund라는 소도시가 목적지다.
낯선 곳을 떠도는 게 익숙해졌나보다.
인터넷의 힘을 빌리지 않고,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쉽게 Lund 중앙역까지 이동했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여정의 반이로구나.
처음 시작할 때는 70일이란 기간이 막막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다가오는 귀국일에 아쉬워진다.
역을 빠져나오자마자 아름다운 건물과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나를 반겼다.
호스트가 버스를 타고 오라고 했지만 삼십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라 풍경을 즐기며 걷기로 했다.
도로를 자세히 보면 곳곳에 세심한 배려가 가득하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횡단보도의 턱이 없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가득함을 알 수 있다.
Lund 대학교는 규모도 크고 세계 여러 곳에서 학생이 찾아온다.
자세한 내용은 내일 다룰 예정이다.
숙소에 도착하니 Annette가 나를 반겼다.
사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제법 걱정을 했었다.
그녀의 프로필에 적힌 내용을 보면 급진적인 페미니즘의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녀는 그의 여자친구인 Erika와 다른 여성들과 함께 아파트를 공유하며 지낸다.
거실 겸 부엌 곳곳에서는 인권이나 페미니즘에 관련된 포스터와 글귀가 붙여져 있다.
식탁 위에 올려진 만화책에 눈길이 갔다.
성기가 노출된 그림과 인물들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책이 통용될 수 있는 건 언제쯤일까?
오후 5:01 Map
Erika가 구운 빵을 먹으며 Annette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내 숙박요청이 무척 특이해서 인상이 깊었다고 했다.
하긴.
대뜸 그녀가 언급한 가부장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으니.
그녀와 나눈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가정폭력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제는 아동을 때리는 경우는 없으나 부부 사이 폭력은 남아 있다고 했다.
흔한 것은 아니나 그와 관련된 일을 하는 그녀의 친구가 말해주기를 그녀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빈도가 잦다고 했다.
문제는 폭행 피해자인 여성이 자신의 잘못이라며 신고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심각한 주제와 즐거운 농담을 섞어가며 수다를 떨다보니 그녀가 체육관에 갈 시간이 됐다.
스웨덴에는 작은 마을에도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관이 있다.
그녀는 스무 살때부터 14년간 꾸준히 운동을 했는데 벌써 6년째 강사로서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해서 좋다고 따라갔다.
알고보니 일 년에 세 번 회원 외 사람을 데려갈 수 있는데 그 기회를 나에게 준 것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가로질러 체육관까지 가는 길은 자연이 만든 여유로 가득했다.
아름다운 공원에 감탄했더니 사실은 쓰레기장 위를 흙으로 덮어서 만든 거라고 그녀가 귀띔했다.
그녀는 비록 봉사(한 강좌당 50크로나 정도의 적은 수당만 받음)지만 프로 정신이 투철하다.
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하여 준비를 한다.
덕분에 이날도 음향을 위한 아이팟이 갑작스레 고장났지만 충분히 대처가 가능했다.
시간이 되자 수강생들이 들어왔다.
서른 명이 넘는 인기 강좌다.
절반 이상이 60세 이상의 고령자다.
몸매가 젊은이 못지 않은 분들도 볼 수 있었다.
우리도 시간이 흐르면 이런 문화가 만들어지겠지.
그녀가 진행하는 강좌는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지만 강화된 에어로빅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신나는 음악과 함께 가볍게 움직이는 동작을 하다가 어느 순간 스쿼트, 런지, 크런치, 팔굽혀펴기 등을 섞은 동작을 했다.
더이상은 못하겠다 싶을 때 정리운동에 들어갔다.
이 어려운 과정 중에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가 대단해보인다.
나중에 그녀가 말하기를 웃음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 이전에 남자 혼자만 왔던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녀가 왜 그런 것을 묻냐는 듯이 쳐다보길래 얼른 프로필이 심상치 않아 사실 걱정했다고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예전에 한 터키남성이 묵었던 적이 있는데 예의도 바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같이 버스를 탔을 때 빈자리가 있어 그녀가 양보했는데 그도 양보하면서 끝까지 앉지 않았다고 했다.
남성이라면 여성에게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그런 태도가 그녀를 짜증나게 했다고 말했다.
궁금한 마음에 다시 물었다.
한국에서는 여러 상황에서 매너로 통용되는 것을 마초이즘으로 바라보면 남성 입장에서는 하기도, 하지 않기도 무척 곤란한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녀가 정리해주기를 여성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고, 서로 본심을 잘 표현하는 대화가 중요하다고 했다.
결국 관계고 소통이구나.
운동하느라 지친 몸을 위해 늦었지만 제대로 된 음식을 차렸다.
그녀가 주방장, 나는 보조원.
둘이 킬킬대며 뚝딱 요리를 만들고, 때마침 도착한 Erika와 함께 식사를 했다.
쌀밥에 토마토 소스를 곁들여 만든 요리였는데 내 입맛에 맞았다.
채식주의자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채식도 할만한 거구나.
그러고보니 나와 그녀는 다른 점이 제법 있다.
남자와 여자.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페미니스트와 그렇지 않은 사람.
채식주의자와 가리지 않고 먹는 사람.
그게 뭐 어때서.
서로 존중하고 이해할 수만 있으면 즐겁게 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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