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까지 만화를 봤다.
다음 날 일정도 없고 술도 깰 겸 잠깐 읽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금방 흘러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시간이란 참 신기하다.
한 없이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찰나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짧을 때도 있다.
나는 무얼 하며 지낼 때 가장 즐겁게 시간을 보낼까.
모든 순간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수많은 자극 속에서 시간이 어찌 흘러가는지도 모르면서 지루하고 답답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점심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내려갔더니 낯선 남자가 있었다.
아, 어제 Clarissa가 말한 다른 숙객인가보다.
Kiel의 해변가 레스토랑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지난 주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요트대회 겸 축제인 Kieler Woche가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매우 피곤한 상태라고.
그러면서도 축제에 대해서 사진까지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잠시 뒤 그의 아내가 들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알고 보니 둘은 여행의 베테랑이었다.
여행 중에 만난 한국인들이 살갑게 대해줘서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탈리아식 파스타도 만들어줬는데 입에 맞지는 않았다. 하핫.
Clarissa가 4시 즈음에는 도착할 거라 이야기해서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다음 호스트와 약속한 시간이 되어 어쩔 수 없었다.
날씨가 무척 화창하다.
여행을 시작한 뒤로 햇빛이 가장 강렬하다.
진짜 여름인가보다.
어제 Clarissa가 말하기로는 올해가 유별나게 추운 해였다고 했는데 앞으로는 자켓을 입지 않아도 되는 건가?
부디 그러기를.
몸이 더워질 무렵 새로운 숙소에 도착했다.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Lotta와 Lasse가 나를 반겼다.
거실 한 구석에는 아직 돌도 안된 귀여운 아기가 누워 있었다.
Lotta가 날씨가 좋으니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자며 차와 간식을 챙겼다.
말끔한 정원이다.
이런 공간이 바로 옆에 있다니 얼마나 좋을까.
물론 관리를 위해 많은 노력이 들겠지만 말이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자리를 잡았다.
Lotta와 Lasse는 부부교사다.
Lotta는 고등학교에 근무하지만 현재는 육아휴직 중이다.
Lasse는 Schleswig의 종합학교에서 수학교사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모두 교사다보니 각국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PISA에서 항상 고득점을 취하는 한국 교육의 속사정을 들려주니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긴 공부 시간과 과도한 경쟁 등으로 인해 공부에 대한 흥미가 최하위권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간 피상적으로 주어 들은 독일의 교육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가장 신기했던 점은 학교에 업무를 할 만한 공간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면 교사들은 할 일을 들고 집으로 간다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Lotta의 어머니께서 찾아오셨다.
기품이 느껴지는 분이셨다.
Flensburg에서 살고 있지는 않지만 가까운 거리라 자주 찾으신다고 했다.
Lasse와도 허물 없이 지내는 것 같았다.
가까운 곳에 서로 아껴줄 수 있는 가족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할까.
오시자마자 갓 만든 따끈한 잼 세 통을 탁자에 올려놓으신다.
하핫.
역시 어머니의 마음이란.
아기까지 다섯이 한참 동안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우다 Lasse는 업무 때문에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이어 어머니께서도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여행 잘 하라는 인사를 끝으로 떠나셨다.
Lotta가 배가 고팠던지 저녁을 먹자며 음식을 준비했다.
요리가 끝날 즈음부터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쉽게 달래지지 않자 Lotta가 Lasse에게 아기를 맡겼다.
드디어 식사 준비가 끝났는데 Lasse가 도저히 안되겠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한 숟갈도 뜨지 못한채 Lotta가 식탁을 떠났다.
자꾸 울어대는 아기 때문에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며 식사를 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위대하다.
Lasse가 내일 자신의 학교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좋은 기회라 그러자고 했더니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수업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교사들이 재택근무를 하기 때문에 웹페이지를 이용하여 소통하는데
한국 교사가 지금 자신의 집에 묵고 있다고 하니 영어 수업을 같이 해보면 어떻겠냐고 묻는 상황이었다.
세 번의 수업에 들어가는데 각 수업마다 5분에서 10분 정도 한국에 대해 이야기해주면 된다고 했다.
어려운 지역의 종합학교이다 보니 아이들이 영어도 잘 모르고 많은 질문을 하지 않을 거라고 걱정 말라고 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있을까.
부족한 영어 실력에 매 수업마다 학년이 전혀 다른데.
흔쾌히 수락했지만 밤이 깊어지는 만큼 고민도 깊어졌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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