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유럽에서 살다

<8일차>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

아상블라주 2015. 6. 23. 23:39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천천히 짐을 챙겨 거리로 나섰다.

역까지 거리가 있는데 비가 제법 와서 건물 밑에서 비가 잦기를 기다렸다.

베를린에 와서 비를 맞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다.

나쁜 날씨 탓에 우울해진다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오전 9:21  Map


기차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으며 역으로 향했다.

다행히 크게 젖지 않고 도착했다.

방수 자켓을 가지고 온 것은 정말이지 신의 한 수였다.

오전 9:43  Map


어제부터 목이 따갑고 머리가 약간 아픈 것이 감기가 온 모양이다.

하긴.

좋지 않은 날씨에 계속 밖을 돌아다녔으니 아플만 하다.

북유럽이 더 추울 텐데.

함부르크에 가면 반드시 외투를 사입어야겠다.

오전 11:15  Map



어두운 날씨만큼 고독하게 지낸 베를린.

이젠 안녕!

오전 11:19  Map


갑자기 기차가 도착할 플랫폼이 바뀌었다.

전광판을 계속 보고 있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오전 11:23  Map


일주일 동안 사용한 금액을 계산해봤더니 412.67 유로가 나왔다.

하루당 75,000원 정도 쓴 셈이다.

매일 한 끼니는 푸짐하게 먹었음에도 이 정도면 선방했다.

카우치 서핑이 익숙해져서 앞으로 숙박비는 더 적게 나갈 것이다.

그러니 너무 아끼려 하지는 말자.

오전 11:50  Map


잠이 덜 깬 상태로 기차가 멈춰 있길래 뭐지 하고 생각했다.

다시 잠에 들 무렵, 아차 하고 시계를 봤다.

도착 예정시간이 약간 지난 상황.

급하게 배낭을 챙기고 일어섰다.

제발 문이 닫히지 않길 바라며 출구로 나가는데 왜 그리 거리가 멀게 느껴졌는지.

다행히 내릴 때까지 문은 열려 있었고 내리자마자 마주친 사람에게 여기가 함부르크가 맞냐고 물었다.

맞단다.

휴우. 한숨 돌렸다.

오후 2:07  Map



이제는 익숙하게 지역 카드를 구입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함부르크는 베를린과 달리 날씨과 화창했다.

호스트의 집으로 가는 동안 평범한 집을 계속 볼 수 있었다.

독일에 온 후로 창가에서 꽃을 키우는 집을 자주 보았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나 보다.

오후 2:31  Map



새 풍경을 구경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그의 집 앞이다.

Ole가 반갑게 맞았다.

고맙게도 곧장 차와 음식을 대접해주었다.

일주일 간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렸다.

낯선 공간이지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아, 이게 집의 힘이구나.


Ole는 신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 야간에 로펌에서 비서 생활을 한다.

학생 신분이라 시간당 11유로(당일 환율로 약 14,000원)를 받는다고 했다.

베를린에서 무얼 구경했냐고 묻길래 베를린 장벽과 동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정당 정치 문제로 이어졌다.

Ole의 말에 따르면 현 총리인 메르켈이 소속된 정당(독일 기독교 민주연합-이하 CDU)이 가장 크다고 한다.

CDU 다음 거대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은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그 외 소수정당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사람들이 변화의 가능성을 점점 포기하면서 투표율이 저조해지고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 한 독일 청년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국내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이동하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나눴는데 모든 주제가 흥미로웠다.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며 그가 해준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독일인은 자신들의 기술력을 자랑하지만 독일 내에서는 그렇지 않다며 불평했다.

에스컬레이터가 자꾸 고장나는데 완벽하게 수리를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 안이 지저분하고 교통비도 너무 비싸다고 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한 달 자유이용권(Monatskarte)이 약 80유로(당일 환율로 약 100,000원)라고 했다.

응? 나쁘지 않은 가격인데?

서울 편도 지하철 가격이 약 1유로라고 하니까 무척 부러워했다.

난 오히려 식료품과 의류 구입비가 싼 것이 부러운데.

다들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시청건물.

사진으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다.


Ole와 헤어진 후 그가 소개해준 아웃도어 매장(노스페이스)에 갔는데 아동용 더블재킷이 없었다.

남성용은 나에게 너무 컸다.

어쩌지.

오후 4:58  Map



한국에서도 하지 않는 쇼핑을 여기서 하게 됐다.

역시 독일의 전통 아웃도어, 잭 울프스킨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동 매장이 지하에 따로 있어서 규모도 크고 마음 편히 입어볼 수 있었다.

둘 중 하나를 고르기가 어려워 직원에게 어느게 낫냐고 물었다.

직원이 내 모습을 보고서는 하나를 골라줬다.

알고 보니 다른 하나는 여자 아이를 위한 옷이었다.

어째 끌리긴 하지만 품이 작아보인다 했다.

처음하는 택스프리까지도 일사천리였다.

사랑한다. 잭 울프스킨.

오후 5:37  Map



Ole가 말하기를 독일 전역에서 함부르크에 가장 먼저 애플 매장이 들어섰다고 했다.

그래서 함부르크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는다며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매장에 한 번 들어가봤다.

한국에서 보지 못한 애플워치부터 시작해서 엄청난 규모의 물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각 제품마다 수십대씩 진열이 되어 있고 마음껏 써도 누구 하나 규제하지 않았다.

심지어 2층은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PC방처럼 맥과 맥북을 진열하여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했다.

여백과 단순함을 살린 매장의 디자인도 뛰어났다.

애플이 이름을 날리는 이유가 있다.



햄버거(Hamburger)가 함부르크(Hamburg)가 원조라는 설이 있다.

함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햄버거 집 - Jim Block에 왔다.

줄이 매장 끝까지 있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먹어보자.

제일 저렴한 햄버거 세트가 7.4유로.

싼 가격은 아니지만 양이 푸짐한 것을 고려하면 한국과 그리 큰 차이는 없다.

패스트푸트 특유의 인공 맛이 덜해서 괜찮았다.

특히 감자튀김은 덜 짜고 덜 느끼해서 저 많은 양을 다 먹을 수 있었다.

오후 7:07  Map



함부르크 시내의 중심에는 고니와 오리를 쉽게 볼 수 있다.

날씨도 화창하고 강과 건물이 어우러진 모습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새로 산 옷까지 겉옷만 세 겹을 껴입었는데도 추웠다.

몸이 허해지긴 했나보다.

아직도 Ole의 퇴근 시간까지 두 시간 정도가 남았다.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뛰어노는 아이들, 축구를 즐기는 남자들, 모여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녀들이 보였다.

함부르크 특유의 운하도 종종 눈에 들어왔다.

평화로운 일상의 연속이다.

거리 곳곳에 가득한 풀과 나무들, 오래된 건물까지.

오후 8:22  Map


독일에서 버스를 볼 때마다 매번 혹시나 했던 점이 있다.

정류장에 설 때마다 버스가 오른쪽으로 기울이는 것이었다.

오른편에 타보니 확실히 알겠다.

장애인이나 유모차를 위해 높이가 줄어들도록 한 쪽이 기울어지는 세심한 배려.

누가 생각한 걸까.

오후 8:32  Map


문이 닫혔음에도 애플 매장 앞에 사람이 많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다.

무료 Wifi가 잡혔다.

심지어 웹사이트를 접속해서 등록하는 절차조차도 없었다.

인터넷 규제가 강한 독일에서는 놀라운 일이다.

이 역시 마케팅의 한 방편이겠지.


드디어 Ole가 퇴근했다.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타국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라.

발음은 좀 이상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집으로 돌아가면서는 종교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참 죽이 잘 맞았다.

이러다 여기에 눌러 살겠다.


Ole에게는 러시아 약혼녀가 있다.

밤마다 그녀와 Skype로 화상통화를 한다.

그가 통화하는 동안 나는 부엌에서 밀린 여행기를 정리했다.

새벽 한 시가 넘자 그가 미안했는지 먼저 들어가서 자라고 했다.

한 번 거절하고 곧장 수락했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