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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아상블라주 2015. 5. 25. 12:29

17세기, 뉴턴의 과학은 인간의 의식 변화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 후로 백 년 동안 빠르게 기계론적 결정론이 확산되었고 철학의 위상은 크게 흔들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학문의 질서를 재정립하려 노력한 이가 칸트였다. 그는 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규정함으로써 철학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과학이 또 하나의 종교가 된 지금, 그는 우리에게 무얼 말해줄 수 있는가.


위험에 처한 철학을 구출하기 위한 그의 작업은 거대하고 대담했다.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맞서 한계선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 그를 위해 과학이 ‘사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칸트는 우리가 직관과 이해를 통해 지식을 만든다고 말한다. 감각경험을 통해 시공간을 받아들이고, 그 사이의 관계나 양상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지식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경험은 한계가 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현상과 사물은 감각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칸트 이후 세기가 두 번 지나는 동안 과학은 더욱 빠르게 발전하여 뇌의 파장까지도 관찰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우리는 여전히 의식 과정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니 과학적 지식은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감각경험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사물 그 자체’를 의식할 수 없다면 더 이상 논의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의식할 수 있는 ‘사물 그 자체’가 단 하나 존재한다. 바로 나 자신이다. 나의 의식은 외부 세계에 대한 나의 지식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떻게 행위 해야 할지를 선택해야 하는 존재로서의 나 자신을 주관적으로 의식하며, 이 존재는 결코 과학적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결코 감각으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23) 따라서 도덕적 선택에 직면했을 때 의식할 수 있는 내면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도덕적 확실성 같은 것이다.


칸트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과학적 지식이 아니다. 과학적 이해를 도덕적 영역으로 확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나는 신념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지식을 부정하는 것이 필연적임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임을 선언한 것이다.


과학과 철학을 분리하는데 성공한 그가 다음으로 직면한 문제는 ‘도덕법칙’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이었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다. 과학을 걷어내어 얻은 자유만 말한다면 방종을 막을 수 없고, 외부에서 주어진 법칙에 개인이 복종한다고 하면 자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는 이 복잡한 문제를 절묘하게 풀어낸다. 자유를 가진 개인은 도덕법칙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새로운 법칙을 창조하고 그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그가 ‘정언명령’이라 부르는 도덕법칙은 다음과 같다.

(1) 언제나, 네 행위의 기본원리가 하나의 보편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2) 언제나,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간주하도록 하라.

(3) 언제나, 네 행위가 이상사회의 법칙을 위한 판례가 될 수 있도록 하라.

모든 이가 이 법칙을 따른다고 가정해보자. 이를 확장하면 모든 개인은 자유를 가지고 있으니 모두 존중되어야 하고, 그것은 공동의 복지를 향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쾌락과 생존을 넘어 어떤 도덕적인 행동을 할 때 내면에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내면 어딘가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목적감이 있다. 우리에게는 그런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울창한 숲 속의 이파리 하나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때,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른 이를 돕는 모습을 볼 때,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다가 뭔가를 깨달을 때 우리는 온몸으로 퍼지는,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을 경험한다. 진리를 탐구하고 도덕을 추구하며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경험이 많아질수록 세상과 분리되지 않은, 전체로서의 나를 느낄 수 있다. 과학으로는 밝힐 수 없는 그 질서를 따라간다면 만물이 조화롭게 지낼 수 있는 세상을 희망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