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게까지 걱정하던 것은 꿈인 것처럼 늦게까지 푹 잤다.
거실로 나가니 Jens가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간밤에 호스트를 구했다고 이야기하자 자기 일처럼 기뻐해줬다.
하루 더 묵는 김에 얼굴에 철판을 깔고 좀 더 신세를 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세탁기를 써도 되냐고 물어보니 그러라며 대답했다.
얼른 샤워를 마치고 모아둔 빨래를 세탁기에 넣었다.
Jens에게 어떻게 작동시키냐고 물어보려는데 헤드폰을 낀 채 게임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동시에 게임하고 있을텐데 방해하기가 미안해서 조금만 기다리자고 생각했다.
삼십 분이 지나도 멈출 생각을 않았다.
이렇게 된 김에 밀린 여행기나 쓰는 게 낫겠다.
한 편을 다 쓰는 동안에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혀를 내두르며 더 쓰고 있는데 거실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이때다 싶어서 세탁기 사용에 대해 다시 물었다.
그가 게임하느라 잊어버려 미안하다며 세탁기를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점심을 먹을 때를 훌쩍 넘겨 어딘가로 가기도 마땅찮은 시간이다.
그냥 밀린 글을 모두 마무리 하자.
장장 7시간 동안의 게임을 마친 Jens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끝난 거냐며 짖궂게 말을 걸었더니 민망해 하며 웃었다.
하긴. 우리나라로 치면 긴 시간이 아니다.
오후 3:49 Map
점심도 거른 채 게임을 하느라 배가 고픈가 보다.
물론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얼른 장을 보러 나갔다.
중간에 내 옷을 보러 벼룩시장에 갔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그가 생각한 음식은 미트볼을 곁들인 스파게티다.
채소 몇 가지와 미트볼을 구입했다.
돌아오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르게 요리했다.
이번에는 그가 주방장, 내가 보조다.
만들어놓고 보니 생김새가 그럴싸했다.
겉보기만 아니라 맛도 좋고 양도 많아 배부르게 먹었다.
이제보니 요리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다.
옆에서 채소를 뚝딱 썰어주는 이가 있으니 금방 하는구만.
내가 남보고 뭐라 할 처지는 아니다.
다음 학기에는 주말에라도 기회가 되면 요리를 해야겠다.
이 부른 배를 가만히 두기가 불편해 산책갈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보물을 찾으러 가자는 뚱딴지 같은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Geocaching 이라는 현실에서 보물을 찾는 놀이다.
한적한 곳에 물건을 숨겨놓고 온라인상에 GPS 위치 등을 올려두면 다른 사람이 찾아내는 방식이다.
오! 재밌겠다.
오후 5:49 Map
그의 집 근처에 보물이 숨겨진 곳이 있다고 해서 따라나섰다.
GPS가 가리키는 위치는 뒷산 중턱이었다.
길도 없는 곳을 오르다보니 흥미가 떨어졌건만 Jens는 열심이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가 열심히 보물을 찾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내 일이 됐다.
바위에 걸터 앉아 그를 바라보는데 내 발 밑에 플라스틱 통이 있어 장난으로 여기 보물 있네 라고 외쳤다.
그런데 그게 정말 보물이었다.
보물은 별 게 아니고 통 안에 약간의 기념품과 작은 방명록이 있다.
방명록을 펼치면 누가 언제 이 곳을 다녀갔는지를 알 수 있다.
2007년에 숨긴 이후로 지금까지 참 많은 이가 다녀갔다.
기쁜 마음에 보물을 든 채 기념촬영을 하고 다시 제자리에 돌려놨다.
보물찾기 끝! 이라고 외치는 순간 그가 한 군데만 더 가보자고 했다.
산책이라고 하기엔 부족하기도 해서 그러자고 했다.
오후 6:11 Map
그 다음 가까운 곳은 마을 외곽.
Jens가 자신이 잘 아는 곳이라며 그 쪽으로 가자고 했다.
GPS가 가리키는 위치에 다다랐는데 다리 위였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 숨길 만한 위치를 둘러보았다.
그때 딱 보인 다리 밑 작은 틈새.
체구가 작은 내가 들어가기도 비좁았지만 보물을 숨기기에 딱이다.
역시나.
자연스럽지 못한 돌을 들어내니 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삼 주 전쯤에 다른 일행이 다녀간 모양이었다.
이번 보물상자 안에는 볼펜이 들어있어 그 아래 Jens의 이름도 새겨 넣었다.
그는 이 놀이에 무척이나 흥미로워했다.
하루 종일 내가 이걸로 농담을 해도 그때마다 큰 소리로 웃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한국에 보물이 숨겨준 장소를 보여줬다.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
여전히 꺼지지 않은 배를 두드리며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갑자기 장난끼가 발동해서 책과 차 중에 하나를 골라보라고 했다.
Jens가 당황한 눈치다.
그래도 내가 막 재촉했더니 책을 골랐다.
책갈피를 꺼내 짜잔하며 줬더니 아이처럼 좋아했다.
얼른 포장을 풀어 책을 꺼내 꽂아봤다.
그와 함께 Gothenburg에서의 마지막 노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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