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일상의 변화

제주여행? 제주살이!

아상블라주 2014. 8. 19. 12:28

얼마 전, 제주에 간다고 하니

많은 분들이 부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내 고향이 제주라고 밝힐 때면,

상대방은 놀라움과 부러움을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묘한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나에게 제주는, 여행지가 아닌 고향일 뿐이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제주를 떠나 살아본 적이 없지만

관광을 다니거나, 나들이를 다닌 경험도 별로 없기에.


며칠 전, 제주의 부모님 댁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반갑게 나를 맞이하셨다.

아버지께서 보이지 않자 어머니께 여쭸다.

"아방은 일하러 가수꽈?"(아버지께서는 일하러 가셨어요?)

"게. 농부가 이 시간에 일하지, 뭐 하크냐."(그럼. 농부가 이 시간에 일하지, 뭘 하겠니.)


그 길로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과수원을 둘러봤다.

오랜만에 온 과수원 길가에는 수국이 가득했다.

"이거 다 아방이 심건?"(이거 모두 아버지께서 심으셨어요?)

"손주들 보여주캔 하멍 영 심겄져."(손자들 보여주겠다고 하며 이렇게 심었어.)


은은한 하늘색의 아름다운 수국이

무뚝뚝한 아버지의 모습과 상반되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버지, 저 왔수다."(아버지, 저 왔어요.)

"항수 와시냐? 오잰 허난 속았져."(항수 왔니? 오느라 고생 많았다.)

"일 도와줄 거 어수과?"(일 도와줄 거 없어요?)

"게매. 네가 도와주캔 허믄 저쪽디레 가봐사켜."(그러게. 네가 도와주겠다면 저쪽으로 가봐야겠다.)


아버지를 따라간 곳에는 쓰지 않는 배수관이 가득했다.

몇 년 전 겨울, 무척 고생하며 설치한 것이라

어머니께서는 이 아까운 것을 버리냐며 서운해하셨지만,

아버지께서는 이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신 듯 했다.

 

아버지를 도와 배수관을 화물차에 싣기 시작했다.

무게가 가벼워 일하기가 수월했지만

배수관의 양이 많아 이걸 몇 차례에 걸쳐 옮길 지가 걱정이었다.


"이거 한 네 번은 해사될 거 닮은디예?"(이거 네 번 정도는 해야할 것 같은데요?)

"경 하믄 일이 되나? 최대한 올려사주."(그렇게 하면 일이 되나? 최대한 올려야지.)

아버지께서는 내가 예상한 이상의 양을 올려쌓고 밧줄로 단단하게 옭아맸다.

그렇게 두 번만에 모든 배수관을 옮길 수 있었다.


매번 이렇게 아버지께 배우게 된다.

머리로만 판단하지 않고,

최대한의 노력으로 직접 부딪히면 상상 이상의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

나는 아직도 멀었다.




일 하나를 마치고 나니 그제서야 과수원의 풍경이 보였다.

부모님께서는 올해는 풍작이라고 아이처럼 좋아하시며 나에게 자랑하셨다.

단순히 양만 많은 것이 아니라 상태도 무척 괜찮은 것이 부모님께서 뿌듯할 만 했다.


나무 가득 열린 초록색의 방울은

금세 노란색으로 물들며 과수원을 환하게 밝혀줄 것이다.

부모님의 땀에 보답하듯 가득히.




어머니께서 저녁을 준비하러 간 사이

아버지는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셨다.

뒤따라가보니 마른 가지가 구석 가득히 있었다.

"바람 어디로 불엄시냐?"(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고 있어?)

"게매예. 지금 서풍이랑 남풍이랑 섞영 불엄수다.(그러게요. 지금 서풍이랑 남풍이 섞여서 불고 있어요.)

"게믄 됐져."(그럼 됐다.)


마른 나무를 쌓아놓고 아래에 잔 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다.

순식간에 치솟은 불길은 어두운 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학교 행사 때 경험한 캠프파이어의 불과는 전혀 다른,

무척이나 강렬하고 뜨거운 불꽃이었다.

나무는 불 속에서 자신을 하얗게 불태우고 재가 되어 하늘 높이 날아갔다.




이후에도 무더운 여름의 햇살을 피해

새벽부터 오전까지 일하고 

오후에는 산책을 가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보슬비를 맞으며 돌담길을 따라 아버지와 단 둘이 동네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관광객이 가득한 길을 피해 올레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평범한 나날이지만,

이 시간, 이 풍경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지금은 안다.



이제 이틀 후면 제주도를 떠난다.

타향살이를 한지도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가니

사람들이 왜 제주에 그렇게 환호하는지 알 것 같다.


제주가 갖고 있는 생태적인 이미지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황홀한 풍경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를 연결지어 즐겁게 대화를 진행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에게 제주는, 여행지가 아닌 고향이다.

내가 나서 자란 곳.

그래서 소중하고 고마운 곳.


나는 제주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