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유럽에서 살다

<45일차> 듣기만 해도 그리운 이름, 부모님

아상블라주 2015. 7. 30. 23:53

일어나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누나가 부모님 댁에 있다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매번 통화만 했는데 드디어 화상통화를 할 수 있겠구나.

연결음이 끝나자마자 조카들의 왁자지껄 소란이 들렸고 이어 어머니의 얼굴이 작은 화면에 가득 찼다.

그 너머로 반쫌 등을 돌린 아버지가 보였다.

누나의 핀잔에 아버지께서 돌아보며 웃으셨다.

무뚝뚝한 척 하시는 건 여전하시구나.


계속 얼굴을 보며 통화하기엔 영상이 자꾸 끊겼다.

서로 건강한 얼굴을 확인했으니 통화로 바꿨다.

지난 번 어머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자주 통화하니 자식이 해외에 있는지 육지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떨어져 지낸지 벌써 20년, 제주를 떠난 것도 10년이 다 되어 간다.

여행이 끝나면 곧장 찾아가겠다는 말에 어머니께서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몸 먼저 챙기라고 하셨다.


귀염둥이 손녀들의 재롱도 봐야할테니 길게 통화하지는 않았다.

항상 하시는 것처럼 어디에 있든 잘 먹고, 운동 잘 하고, 잘 자면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셨다.

저 말씀을 오래 들었으면 좋겠다.



뭉클한 마음을 안고 거실로 나가니 조용했다.

훤한 부엌에 앉아 아침을 먹는데 바람이 나오라고 자꾸 손짓했다.

애써 무시하고 여행기를 쓰고 있는데 알람 소리가 들렸다.

흔치 않은 최고의 날씨를 마음껏 즐기라는 Ann의 연락이었다.


여행기를 마저 쓰고 얼른 점심을 먹자마자 밖으로 나섰다.

이런 날씨는 정말 오랜만이다.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동네를 걸어다녔을 뿐인데 자꾸 걸음을 멈추곤 했다.

흐린 날에도 예쁜 마을인데 햇살까지 더해졌다.





호숫가로 들어갔는데 모래사장이 있었다.

끝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큰 호수와 고운 모래가 함께 있는 광경이란.

물가에는 꺄르르 소리를 내며 아이들이 뛰어놀고 모래 위에는 어른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멀리 바위 위에서 다이빙을 즐기는 남자 아이들도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뒤돌아보지 않고 뛰어들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건너편 바다로 가니 정박장에 배가 가득했다.

눈 앞의 풍경보다는 방금 호수가 자꾸 아른거렸다.

사진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

얼른 돌아가서 수영복을 챙겨입어야겠다.



어린 아이처럼 들뜬 채로 호수 안에 몸을 담갔다.

생각보다 물이 찼지만 제 정신을 차리기엔 부족했다.

되지도 않는 수영을 하며 허우적 거렸다.


바위 위에 걸터앉아 햇살을 몸으로 받아냈다.

차가운 몸이 금방 데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해가 구름 뒤로 숨어 쌀쌀해졌다.

금방 다시 나오겠지 하며 기다렸는데 몸이 떨릴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아쉽지만 즐거웠다고 기뻐하며 집으로 들어섰는데 천둥 소리가 들렸다.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자찬했다.


따뜻한 물로 몸을 녹이고 거실로 나오니 방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천둥 소리가 들렸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맙소사 폭우가 쏟아진다.

오후 3:55  Map


북유럽 신화에서 왜 Thor(천둥의 신)가 중요하게 다뤄지는지 이제야 알겠다.

여름마저도 짧게 해를 볼 수 있는 그들은 순간을 즐기도록 변하지 않았을까.


비를 뚫고 Ann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 역시 흔치 않은 괴상한 날씨에 혀를 내둘렀다.

일 하느라 고갈된 기운을 충전시키고 비빔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7인분을 준비해야 했다.

그래도 Ann이 말벗이 되어줘서 요리 내내 즐거웠다.


냄비로 밥을 완벽하게 짓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Ann의 아들 Ravn이 먹어보더니 Perfect라고 엄지를 치켜올렸다.



식탁을 완벽히 차려 놓은 후, 주린 배를 붙잡은 채로 손님을 기다렸다.


Ann의 말처럼 약속 시간이 지나서야 하나 둘 도착했다.

어제 만난 유쾌한 장난꾸러기 Tito,

그의 여자친구이자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 Heidi, 

수제맥주 전문가 Haakon,

수줍어하며 가족을 챙기는 의 삼촌 Marius,

Ann과 Ravn, 그리고 나까지.

둘에게는 넓은 거실이 북적북적했다.





나의 시범 후에 각자 먹고 싶은 만큼 재료를 덜었다.

맵다는 나의 경고에 조심스럽게 한 입을 먹더니 정말 맛있다며 칭찬했다.


다들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니 고생한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누구 배가 더 불렀는지를 자랑했다.


Tito의 말장난에 모두가 깔깔대고 있는 중에 Ann이 자신의 입양서류를 확인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녀가 보여준 서류는 깔끔하게 보관된 상태였다.

그녀의 양부모가 잘 챙겨둔 덕이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사망 상태로 되어 있는 부분을 보고 아버지인줄 알고 화들짝 놀래더니 이내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녀 역시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은 없나보다.

영어로 적힌 서류가 대부분이었지만 원본은 한글이었다.

이제까지 서울태생으로 알았던 그녀에게 본적이 어디인지, 부모의 이름은 무엇인지 등을 알려주었다.

친권포기 서류에는 친부모가 직접 찍은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부모의 주민등록번호가 적혀있고 입양을 추진한 기관이 아직까지도 존재하는 큰 재단이니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아직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그들이 보기를 꺼려하는 것이 가장 무섭다며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오후 8:13  Map




이내 마음을 추스린 Ann이 친구들과 흥겹게 음악을 즐겼다.

세 명의 기타 연주와 Heidi의 노래 소래가 어우러졌다.

갑자기 Ann이 나보고 무슨 노래를 듣고 싶냐고 묻었다. 

당황한 내 눈에 거실에 걸린 Jason Mraz의 사진이 보였다.

'I'm Yours'라고 했더니 다른 이들의 반주에 맞춰 Tito가 근사한 목소리로 불러줬다.


진한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끌어안은 그들의 몸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Ann과 함께 집을 정리하며 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것 같았다.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연락하라고 했더니 나보고 참 너그러운 사람이라며 고맙다고 했다.

항상 밝고 활기찬 그녀.

마음 한 구석의 허전함이 언젠가는 채워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