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일차> 바람을 따라 바다를 누비다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남매의 것이다.
너무 피곤해 잠을 더 청하려는데 다른 알람이 울렸다.
Nisse의 것이다.
몸을 추스리고 함께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남매가 모두 부지런하다.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점심에 먹을 샌드위치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 어제 시내에서 장도 보고 왔다.
순식간에 긴 바게트에 각종 채소와 치즈 등을 올려놓는 그의 모습을 보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여유롭게 작별의 인사를 나누길래 시간이 충분한가 보다 했더니 배를 나서기가 무섭게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냅다 달렸다.
해안을 향해 달리다가 아차 싶어 맞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는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까지 매력적인 남매다.
아침도 먹었겠다 한가로이 배에 누워 낮잠을 잤다.
오호라.
천국이 따로 없구나.
점심 즈음에 다른 카우치 서퍼가 배를 찾을 거라고 했다.
시간을 맞춰 점심 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응?
Nisse가 샐러드에 채소를 전부 날 것으로 넣었다.
당근, 버섯, 마늘, 양파, 대파 등이 제 색을 유지한 채 그릇에 담겼다.
문화적 충격이다.
쿠스쿠스란 요리라며 샐러드와 찐 밀 알갱이를 섞어서 먹으면 된다고 했다.
맛이 어떨까 궁금해하는 찰나 Steven이 도착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곧장 식사를 했다.
각각의 재료들이 따로 맛을 내면서도 나름의 조화를 이뤘다.
그러고보니 한국에서는 생으로 채소를 먹는 경우는 쌈을 제외하면 별로 없구나.
Steven은 독일의 스포츠용품 매장에서 점원으로 일한다.
2주 정도의 휴가 기간을 맞아 북유럽을 여행중이라고 했다.
독일인답게 그가 가져온 선물은 술!
주류를 구하기 어려운 스웨덴에서는 최고의 선물이다.
잔잔했던 바다가 점점 일렁이기 시작했다.
출항의 시간이다.
정박을 위한 줄을 풀고 엔진을 이용해 정박지를 탈출했다.
여기까지만 엔진을 쓴다고 했다.
바다 위에서는 오로지 바람을 타고 움직인다.
차라락 소리와 함께 돛이 활짝 펴졌다.
Nisse와 Steven은 돛의 방향을 바꾸고 나는 키를 잡았다.
Nisse가 빠르게 어떻게 바람에 맞춰 키를 조정하는지 알려줬지만 너무 빨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몇 번 실수를 한 끝에 곧잘 하게 됐다.
처음에는 Nisse가 알려준 대로 돛 한 가운데에 달린 빨간 줄과 초록 줄을 보며 키를 잡았다.
그 줄이 수면과 평행을 이룰 때가 최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바람을 느끼며 방향을 잡았다.
바람의 힘만으로 무거운 배를 유유히 흐르게 한다는 것은 참 매력적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람의 변화를 느끼며 돛과 키의 방향을 바꾸는 것 뿐이다.
그렇기에 목적지까지 일직선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며 갈 수밖에 없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안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할 뿐, 우리가 마음 먹은 대로 살아가기에는 변수가 무한하다.
하지만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니고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삶이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라는 말뫼의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 외래순 해협을 가로지르는, 내가 기차를 타고 지나갔던 다리가 보였다.
이렇게 배 위에서 다시 볼 줄이야.
이 사진을 찍을 즈음부터 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키를 놓지 않으려 애썼지만 상태가 점점 나빠졌다.
그 와중에 Nisse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얼른 촬영했다.
드디어 외래순 다리를 통과했다.
가까이 가니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어마어마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덴마크 바다 위에는 풍차가 가득했다.
이런 노력이 있으니 탈핵이 가능한 거겠지.
점점 상태가 악화됐지만 그렇다고 키를 놓을 수는 없었다.
물론 Nisse나 Steven에게 맡겨도 됐지만 마지막까지 내가 하고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박지가 점점 가까워졌다.
역시 마음이 편해지면 몸도 나아진다.
주차(?)까지 내가 해보리라 생각했지만 Nisse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키를 잡았다.
세 시간 가량의 항해를 마치니 무척 피곤했다.
시내로 구경가겠다는 Steven을 배웅하고 곧장 드러누웠다.
바다의 거친 매력을 제대로 느꼈다.
하지만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경험은 정말 짜릿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Nisse가 어제 말한 오래된 어부 마을로 산책을 가자고 했다.
가는 동안 다양한 종류의 범선과 배를 볼 수 있었다.
Nisse의 정박지의 두 배가 넘는 거대한 정박지도 있었다.
산책을 하는 동안 Nisse가 배의 구조와 종류 등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의 설명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가 얼마나 배에 열정이 가득한 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Steven이 돌아왔다.
남자 셋이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른 배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램프를 켠 채로 이야기를 나누니 분위기가 한층 좋아졌다.
배 위로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