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책·연수·강의

변화를 바란다면 기죽지 마라

아상블라주 2015. 6. 1. 14:13

누군가 나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언제였는지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2007년 어느 여름밤이라고.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읽는데 갑자기 깊은 곳에서부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교사임용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던 나와 무척 달랐다. 쉼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도, 흐느끼는 소리에 떨리는 몸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저 흔들리는 나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어느 하나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책을 덮고 가만히 앉아 내면을 깊이 바라보았다. 뒤엉킨 생각이 점점 가라앉고 온몸에 따스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젊음 특유의 치기 어린 희망에 부풀었다. 그날 밤 나는 ‘세계통합기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가 실현된 세계.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지 않은가.


다음 날부터 당장 시험 준비를 관두고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설립할지, 어떤 모습으로 구현할지 찾고 고민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기구와 제도를 마음껏 창조하고 해체할 수 있었다. 모든 국가들을 연결하여 더욱 거대한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국가 간 무한 경쟁에서 협력을 위한 경쟁의 틀로 변화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던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내가 꿈꾸는 세계는 이상적인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틀리진 않았을까? 무엇이 진정 보편적인 가치인가? 당시의 나로서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계속 앞만 보고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무작정 시도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꿈이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에 대해, 인간에 대해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공부와 사색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인지 고민했다. 나는 작은 섬의 선생님이 되었다.


어느덧 삼십대가 되었다. 한 여름밤의 결심은 어릴 때의 꿈일 뿐이라고 여길 법도 한데 아직까지도 예전 방향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보다 나은 세상을 바라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를 위해서 세계통합이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법에 얽매이는 순간, 목적은 수단으로 바뀐다. 아름다운 수사학에 불과한 신세가 된 목적 뒤로 권력과 욕망이 숨어서 제 몫을 챙긴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세계를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나올지 모른다. 내가 그럴 뻔 했다. 그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도, 우리도 모르게 은밀하게 감춰진 권력을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최근 십여 년, 세계 흐름을 살펴보면 급변하는 시대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사상에 대한 믿음이 크게 흔들리고, 생산양식의 급격한 변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런 시기는 인류의 위기이자 기회다. 그러나 이상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 먼 미래에 대한 약속보다는 당장의 이익이 좋다. 그렇지만 대놓고 이익을 말하기에는 부끄럽다. 그럴 때 그 시기에 추구되는 가치는 가면으로 쓰이기에 더할 나위 없다. 이번에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지 모른다. 그러니 상황을 철저히 분석하고 보편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그 역할을 맡는다고 타인에게 인정받을 거라 착각하지는 말라. 혼란의 시기에 바른 말을 하면 어리석거나 답답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방향을 조정하는 역할은 인류 전체를 위해 필요하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걸어가라. 


지식인들이 이행의 시기에 요청받은 과제들을 추구한다면 그들은 인기가 있을 리 없을 것이다. 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분석이 특히 이행의 시기에 권력을 붕괴시킨다고 느끼면서 그들이 하는 일에 당혹해할 것이다. 힘 있는 사람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 망설임과 너무나 많은 뉘앙스 그리고 조심스러움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 노동계급은 지식인들의 분석이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 그럼에도 지식인의 역할은 중차대하다. … 지식인들이 분석의 깃발을 높이 쥐고 있지 않으면, 다른 어떤 이들이 그렇게 할 가능성은 없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 <유럽적 보편주의 : 권력의 레토릭> 144~145쪽